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의 일요일 사건 (문단 편집) === 주바톱시나 === 피의 일요일 사건의 기원은 세르게이 주바토프(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로 인해 시작된다. 그는 본디 어린 시절부터 유독 특이하고 이중적인 면모가 강한 사람이었다. 학창시절에는 김나지움을 다니며 드미트리 피사레프 등의 금지된 책들을 읽으며 [[니힐리즘]]에 심취하였다. 또한 니힐리스트들의 서클을 만들어 선생들과 논쟁을 벌였고 학생들을 선동하다가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의 요청으로 퇴학 당했을 정도였다. 그 뒤 도서관과 전산국에 일하면서 직장에서 접하게 되는 혁명가, 사상가들에게 금지된 책과 저서들을 기꺼이 제공해주는 등 그들과 교류했으나 그렇다고 직접 혁명 활동에 나서는 등 전면적으로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886년 여름 어느날 그는 어떠한 혐의를 받고 경찰에게 소환된다. 경찰은 그가 일하던 도서관이 반동불자, 불순분자들의 음모의 아지트로서 이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주바토프는 도서관이 자신도 모르게 이용되고 있다는 것에 격분하였고 이런 유해한 범주의 인간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실제로 주바토프가 저 '배신'을 계기로 전향하여 비밀경찰의 일원이 되었는지 아니면 정말 저 '불순분자'들의 일원이었으나 살아남기 위해서 동지들을 팔아 넘겼는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실제로 주바토프가 그 이전부터 비밀경찰의 일원이거나 협력관계였다는 내용의 사료도 존재한다.[* 사실 1902년에 주바토프 본인이 가폰에게 자신이 혁명 활동에 투신했다고 인정했다. 반대로 1888년 5월에 모스크바 경찰청장 예브게니 유콥스키는 경찰국장 표트르 두르노보에 편지를 보내 그가 혁명당의 일원이 아니었다고 옹호했다. 이 두 증언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니 진실은 주바토프 본인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러시아 제국의 사상경찰로서 일했고 그 일에 대해서 굉장히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주바토프는 반혁명 운동에 투신하였고 경찰국 특수과(Особый отдел)에 들어갈 수 있었다. 특수과는 러시아 제국의 지지기반을 위협하는 이들을 수색및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방첩, 사상범 등 위험인물 색출, 출판물에 대한 사상검증 등 정치와 관련된 넓은 분야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경찰국장에게 직통으로 보고할 수 있던 경찰조직으로 그 중요성과 큰 권한으로 인하여 관련 인물들 내에서 '경찰청의 뇌', 혹은 '경찰청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의 주요 임무는 명러시아 내의 혁명 세력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특수과에선 1886년 가을부터 주바토프를 '프락치'로 보내 그가 비밀 정치 단체나 혁명 조직에 접근해 그들의 신뢰를 쌓으며 내부 정보를 유출시키도록 지시했다. 실제로 그는 언변이 뛰어나 혁명사상에 동조하던 여러 인물들을 여럿 전향시켰으며 또한 그가 유출한 정보를 토대로 모스크바 보안과(Охранное отделение)는 많은 사상범, 정치범, 반동분자들을 체포했고 그들의 단체를 해산시키는데 성공했다. 공을 인정 받은 주바토프는 1896년 보안국의 총책임자까지 승진했으며 후로도 정치범, 사상범 수사 시스템을 개혁하거나 1900년에 민스크에서 러시아 정치자유노동당의 리더들의 체포, 그 다음해에는 사회주의혁명가 북부동맹을 와해시키고 그 리더인 안드레이 아르구노프(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ргунов)를 체포하는 등 여러 공적을 연달아 세운다. 그런데 주바토프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을 알아채게 된다. 체포자들이 자신의 행의의 이념적, 정치적 의미를 이해 여부가 그들의 계급과 명확히 일치했다는 것이다. 지식인-혁명가들은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나 정작 대부분의 노동자[* 주의할 점은 노동자라 하더라도 전문기술자, 중간관리자는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여기서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지식인-노동자들을 제외한다.]들은 요구하는 정치적 개혁은 커녕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의 사상에 대해 이해도 관심도 없었다. 이에 의문을 품은 주바토프는 개인적으로 혁명, 반체제 사상들을 연구했다. 이에 따르면 엘리트층인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교리와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결합시키고 노동자들이 폭력 혁명을 따라야만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동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둘을 분리시키고 정부가 노동자의 편에서 그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만 혁명세력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으로 경찰의 통제 하에 있는 온건한 노동 운동을 위한 노동자 조직들을 창설하겠다고 계획했고 이를 주바톱시나(Зубатовщина)라고 한다. 주바토프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1. 혁명적 교리를 진화적 교리로 대체하고 혁명가들과는 달리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한다. > >2.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정부형태로서의 전제정이 계급에 상관없이 중재적 성격을 띄고 있으며 폭력에 적대적이며 공정하다는 점을 이해시킨다. > >3. 사회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혁명적 노동 운동과 자본주의 구조에 기초한 직업운동의 차이점과 전자는 사회 전계층의 개혁뿐이지만 후자는 즉각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이해시킨다. > >4. 개인의 권리가 공권력의 경계를 넘는 것은 용납할 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공권력으로 향하거나 그것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1898년 주바토프는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고 당시 모스크바의 경찰청장(обер-полицеймейстер)였던 드미트리 트레포프(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와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모스크바의 총독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주바토프의 임무는 노동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친분을 얻으며 현 정권 내에서 그들의 이익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은 다르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를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원조와 사상, 정치 교육를 제공함으로써 성취하려고 했다. 1901년 5월 한 노동자 그룹에 모스크바 총독부에 상호지원 공동체를 설립을 요청했다. 트레포프는 이를 승인했고 기계 생산 노동자들의 상호협력 협회(Общество взаимопомощи рабочих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가 창설되었다. 창립멤버 중 몇몇은 과거의 사회민주당원이었다. 정부의 주도 하에 노동자들에게 비스마르크의 노동법, 시드니 웨브 , 비어트리스 웨프(Beatrice Webb) ,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 하인리히 헤르크너(Heinrich Herkner) 등의 온건 사회주의, 노동 문제에 대한 서적들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러한 어려운 책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주바토프는 노동자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온건한 노동운동 이데올로기 내용이 담긴 소책자의 집필을 레프 티호미로프(Л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хомиров)[*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 [[인민주의|인민주의자]]로서 혁명 운동에 투신했으나 혁명의 폭력과 테러에 환멸을 느끼고 열렬한 [[왕당파|군주주의자]]로 전향한 인물이었다.]에게 요청하였다. 이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모스크바 대학교]]와 과학 아카데미 교수, 학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대표적으로 이반 오제로프(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Озеров)은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붉은 광장]]에 있는 그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맞다]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강연을 했고 노동자 협회 헌장 초안을 작성했다. 조직은 일요일에는 역사 박물관에서, 평일에서 여러 찻집에서 회의가 열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참여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사회주의 계열 혁명세력들이 이들이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고 노동자들을 친정부적으로 선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극심한 사회적 비판을 받은 오제로프 교수는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비방, 더러운 비방만이 돌아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결국 교수, 학자들은 활동을 포기했다. 주바톱시나는 성직자들의 교리 및 도덕 강의로 만족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압력에 맞서면서까지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을 도운 학자는 지식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던 모스크바 검열위원회 책임자였던 블라디미르 나자렙스키(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Назаревский)였다. 1901년 9월 기계 생산 노동자 소비에트(Совет рабочих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가 창설되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주바토프였고 경찰의 비밀요원들이 간부직에 앉음으로서 주바토프는 조직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근로자들의 민원을 접수하고 공장주들로부터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 주정부 역시 소비에트의 편에 서서 공장주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1902년 2월 협회는 비단 제조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냄으로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주바톱시나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전파는 완전히 중지되었고 훗날 소련의 역사가들마저도 주바톱시나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인정했다. 주바톱시나가 막은 또다른 혁명 조직은 유대계 노동자 조직이었다. 1898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전유대인 노동자 연합(Всеобщий еврейский рабочий союз в Литве, Польше и России)', 통칭 분드(Бунд ; בונד)라고 불리는 유대계 사회주의 조직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해당 조직원들을 심문한 주바토프는 이 조직의 체계성과 규모에 경악했다. 이후 주바토프는 분드 조직 색출에 집중하였다. 그는 체포된 분드 조직원들에게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의 차이를 설명하고 전자의 장점과 후자의 해악을 증명하여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체포된 이들은 석방되었고 이들은 분드 내에서 분열을 야기하였다. 기존 분드 지도부는 이들을 강력히 비난하였고 결국 이들은 분드를 떠라 자신들만의 새로운 조직 창설을 발표했다. 1901년 7월 민스크에서 유대인 독립 노동자당(Еврейская независим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이 창설되었다. 경찰은 이쪽 지도부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놓고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진심으로 정부와 싸우는 것보다는 협력하는 것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데 더 유용하다고 믿었다. 주바톱시나 조직들은 모스크바, 민스크, 오데사 등 여러 대도시로 퍼져나갔으며 노동자들은 황제를 찬양하며 친정부 시위를 벌였다. 1902년 2월 19일 농노 해방령이 발표 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5만 여명이 크렘린 근처나 [[알렉산드르 2세]] 기념비로 가서 러시아 제국의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를 불렀다. 반대로 러시아에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몇몇 해외 자본가들은 모스크바 경찰이 파업을 장려하고 있다고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에게 불만을 호소할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사회민주노동당]]을 필두로 사회주의 계열 혁명조직들은 주바톱시나가 그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기 위한 경찰의 함정이며, 여기에 가담한 일부 노동자들, 교수 및 학자들이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고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언론을 통해 퍼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바톱시나는 러시아 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다만 이는 순수하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내무장관 드미트리 시퍄긴과 후임인 뱌체슬랴프 플레베 등은 주바톱시나를 고평가했고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잠재적인 위험이 크다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쨌든 최소한 1903년 이전에는 장관급에서는 대체로 지원해준 편이다. 특히 회고록 등을 보면 내용이 일관성 없고 오락가락한데 '''주바톱시나가 유혈사태의 원인이 된 후에 그것을 지원한 자신들의 책임을 축소하기 위해 왜곡했다'''는 평이 있다. >주바토프와 제가 구축한 이 제도는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우리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첫 번째는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방어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노동자들에게 경제 문제에 대해 가르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유용한 간행물들을 발행해 노동자 계급의 자주성과 지적 수준의 향상을 돕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공했습니다. 주바토프 제도 도입 전의 모스크바는 불만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현재 노동자들은 정부에 우호적이며 기업의 횡포에 맞서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의 모스크바가 불만의 온상이었다면 이제는 평화, 번영, 만족만이 있습니다. >---- >영국 언론인 Review of Reviews와의 드미트리 트레포프의 인터뷰 中 >주바톱시나의 아이디어는 순진한만큼 단순하다. 노동자들은 혁명가들, 즉 온갖 종류의 사회주의 및 아나키스트 조직의 손에 넘어간다. 왜냐하면 혁명가들이 그들의 편에 서서 온갖 혜택을 약속하는 이론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매우 간단하다. 우리는 혁명가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온갖 종류의 경찰-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거나 모든 종류의 사회, 모임, 강연, 설교, 기금회 등을 조직해야 한다. >---- >[[세르게이 비테]], 회고록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